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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기와 가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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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기와 가쓰사부로(山極 勝三郎, 1863년 ~ 1930년)는 일본의 병리학자이자 종양학 연구의 선구자이다. 그는 1915년 세계 최초로 화학 물질인 콜타르를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암을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일본 암 연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야마기타는 7차례 노벨 생리학·의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수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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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기와 가쓰사부로
기본 정보
야마기와 가쓰사부로
야마기와 가쓰사부로
이름야마기와 가쓰사부로
로마자 표기Yamagiwa Katsusaburō
한자 표기山極 勝三郎
출생1863년 2월 23일
사망1930년 3월 2일 (향년 67세)
출생지우에다시
국적일본
연구 분야병리학
모교도쿄 제국대학
경력
직업병리학 학자
근무 기관도쿄 제국대학
주요 업적콜타르를 이용한 인공 암 유발 실험 성공
수상
수상 내역제1회 문화훈장 (1937년, 사후 추서)
참고 문헌
참고 문헌Fujiki, H. (2014). Gist of Dr. Katsusaburo Yamagiwa's papers entitled "Experimental study on the pathogenesis of epithelial tumors" (I to VI reports). Cancer Science, 105(2), 143–9. doi:10.1111/cas.12333.
Encyclopedia of Japan, Katsusaburō Yamagiwa
Nihon Jinmei Daijiten, 山極 勝三郎

2. 생애

야마기와 가쓰사부로는 1863년 시나노국 우에다번(현재 나가노현 우에다시)에서 태어나, 후에 의사의 양자가 되었다. 도쿄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 조교수를 거쳐, 독일 유학 후 1895년 도쿄 제국 대학 병리해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3][4] 그는 일본 연구의 선구자로, 1907년 의학 저널인 《캔서 사이언스》(Cancer Science)를 창간하고 1908년 일본 암 연구회를 설립했다. 1899년 폐결핵으로 요양하면서도 연구를 지속했으며, 1915년에는 동료 의사였던 이치카와 고이치와 함께 세계 최초로 화학 물질을 이용한 인공 암 발생에 성공했다. 이 공로로 1919년 제국학사원상을 수상했다. 1923년 정년 퇴직 후, 1928년 독일에서 노르트호프 융상을 수상했으며, 1930년 폐렴으로 사망하여 야나카 령원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63년 2월 23일에 시나노국 우에다성을 관할하던 우에다번(현재의 나가노현 우에다시)의 봉건 가신인 야마모토 마사쓰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도쿄 가쓰야의 의사였던 야마기와 요시야의 양자가 되면서 야마기와라는 성씨를 받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880년에 도쿄 대학 예비문 과정에 입학했으며, 1885년에는 도쿄 대학 의학부(나중에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로 개칭)에 입학하여 2위로 졸업했다. 1891년에는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892년부터 독일로 유학하여 로베르트 코흐, 루돌프 피르호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유학을 마친 후 일본으로 돌아와 1895년부터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에서 병리해부학 전문 교수로 재직했다. 같은 해에 의학 서적인 《병리총론강의》(病理總論講義)를 집필했다.[3][4]

2. 2. 독일 유학 및 교수 임용

1891년에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892년부터 독일로 유학하여 의학자인 로베르트 코흐루돌프 피르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유학을 마친 후 일본으로 돌아와 1895년부터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에서 병리해부학 전문 교수로 재직했고, 같은 해 의학 서적인 《병리총론강의》(病理總論講義)를 집필했다.[3][4] 그는 일본 의학계에서 연구의 제1인자로 여겨졌다. 특히 1907년에는 종양학 연구를 다루는 동료 평가 방식의 영어 의학 저널인 《캔서 사이언스》(Cancer Science|캔서 사이언스eng)를 최초로 발간했으며, 1908년에는 동료 의사들과 함께 일본 암 연구회를 설립했다.

2. 3. 암 연구 및 인공 암 발생 성공

야마기와 가쓰사부로는 일본 의학계에서 연구의 제1인자로 여겨졌다. 그는 1907년에 종양학 연구를 다루는 동료 평가 방식의 영어 의학 저널인 《캔서 사이언스》(Cancer Science)를 최초로 발간했으며, 1908년에는 동료 의사들과 함께 일본 암 연구회를 설립했다.

인공 암 연구에 앞서 그는 위암 발생 및 간세포암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환경적 요인이 암을 유발할 수 있으며 특정 암을 유발하는 세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당시 암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자극설", "소인설" 등 여러 가설이 존재했다. 야마기와는 굴뚝 청소부들에게서 피부암 발생률이 높다는 점에 주목하여, 외부 자극이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자극설'을 바탕으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동료 의사였던 이치카와 고이치와 함께 토끼의 귀에 지속적으로 콜타르를 바르는 실험을 3년 이상 꾸준히 진행했다. 마침내 1915년, 세계 최초로 화학 물질을 이용한 인공 암 발생에 성공했다.[5]

이 실험은 콜타르를 취급하는 직업군의 사람들에게서 피부암이 자주 발생한다는 임상적 관찰에 근거했지만, 이전의 많은 연구자들이 실패했던 어려운 과제였다. 이전 연구에서는 작은 종양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악성 종양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야마기와는 끈기 있는 연구를 통해 이 성과를 이루었다. 실험 모델 생물로 토끼를 선택한 것도 성공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6] 실험용 쥐를 사용했을 경우, 동일한 방법으로는 암 발생률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6]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야마기와는 1919년에 이치카와 고이치와 함께 제국학사원상(현재의 일본 학사원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는 암 면역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이 분야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 4. 말년

1923년에 도쿄 제국 대학에서 정년 퇴직했고 1928년에는 독일에서 노르트호프 융상을 수상했다. 1930년 3월 2일에 도쿄에서 폐렴으로 인해 향년 67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유해는 도쿄에 위치한 야나카 령원에 안장되었다.

3. 연구 업적

야마기와는 인공 연구 이전에 위암 발생 및 간세포암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며 환경적 요인이 암 발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5] 당시 암 발생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 중 그는 굴뚝 청소부에게서 피부암 발생률이 높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극설'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동료 의사였던 이치카와 고이치와 함께 토끼의 귀에 콜타르를 반복적으로 도포하는 실험을 3년 이상 지속한 결과, 1915년 세계 최초로 인공적인 암 발생에 성공하였다.[5] 이는 콜타르를 취급하는 직업군에서 암이 발생할 수 있다는 임상적 사실에 기반했지만, 이전까지 많은 학자들이 성공하지 못했던 악성 종양 유도를 야마기와가 최초로 성공시킨 중요한 업적이다. 실험 동물로 토끼를 선택한 것이 성공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6] 이후 그는 암 면역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러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야마기와는 7차례(1925년, 1926년, 1928년에는 각각 1차례, 사후인 1936년에는 4차례)에 걸쳐 노벨 생리학·의학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했다.[7] 특히 1926년에는 요하네스 피비게르가 유두종성 위종양을 유발하는 선충이라고 주장한 Spiroptera carcinoma|스파이롭테라 카르키노마la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으나, 이 연구는 이후 학계에서 신뢰성을 잃었다.[8][9][10][11][12] 이 때문에 야마기와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피비게르가 수상한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14] 1966년 전 노벨 위원회 위원이었던 폴케 헨셴은 야마기와에게 노벨상을 추서해야 했다고 언급하며 그의 수상이 불발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15]

3. 1. 인공 암 발생 실험

그는 인공 연구 이전에 위암 발생 및 간세포암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었다. 그는 환경이 암세포를 만든다고 보았으며, 특정 암을 유발하는 세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당시 암의 발생 원인은 명확하지 않았고, "자극설", "소인설" 등이 주요 가설로 존재했다. 야마기와는 굴뚝 청소부들에게서 피부암 발생이 많다는 점에 주목하여 자극설을 바탕으로 실험을 시작했다. 실험은 토끼의 귀에 콜타르를 꾸준히 바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야마기와는 동료 의사였던 이치카와 고이치와 함께 3년 이상 반복 실험을 수행했고, 1915년에 마침내 인공적인 암 발생에 성공했다.[5]

이 실험은 콜타르를 다루는 장인의 손, 얼굴, 머리 등에 암이 생길 수 있다는 임상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이전의 많은 학자들은 작은 종양은 만들어도 악성 종양을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었다. 야마기와는 신념을 가지고 실험을 지속하여 이 발견에 이르렀다. 그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모델 생물로 토끼를 선택한 점이다.[6] 실험용 쥐에서는 같은 방법으로 암을 발생시킬 확률이 매우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야마기와는 이후 암 면역에 관한 연구로 방향을 바꾸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3. 2. 암 연구에 미친 영향

야마기와는 인공암 연구 이전에 위암 발생 및 간세포암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며 환경이 암세포를 만든다고 주장했고, 특정 암을 유발하는 세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당시 암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자극설", "소인설" 등 여러 학설이 존재했다. 야마기와는 굴뚝 청소부에게서 피부암 발생이 잦다는 점에 주목하여 자극설을 바탕으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동료 의사 이치카와 고이치와 함께 토끼의 귀에 콜타르를 지속적으로 바르는 실험을 3년 이상 꾸준히 진행했다. 그 결과, 1915년에 마침내 인공적으로 암을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다.[5]

이 연구는 콜타르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손, 얼굴, 머리 등에 암이 생길 수 있다는 알려진 임상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이전의 많은 학자들은 작은 종양은 만들어도 악성 종양까지는 만들지 못하고 실패했었다. 야마기와는 신념을 가지고 실험을 계속하여 성공에 이르렀다. 모델 동물로 토끼를 선택한 것도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데[6], 실험용 쥐는 같은 방법으로 암을 발생시키기 매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6] 야마기와는 1928년에는 토끼 귀 안쪽 표면에 콜타르를 칠해 편평상피세포암을 유도하는 데에도 성공했다.[13] 그의 암 연구는 이후 관련 연구 분야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야마기와는 나중에 암 면역 관련 연구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7차례(1925년, 1926년, 1928년에는 각각 1차례, 사후인 1936년에는 4차례)에 걸쳐 노벨 생리학·의학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했다.[7] 특히 1926년에는 덴마크의 의학자 요하네스 피비게르가 유두종성 위종양을 유발하는 선충이라고 주장한 Spiroptera carcinoma|스파이롭테라 카르키노마la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는데, 피비게르의 이러한 '발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신뢰성을 잃었다.[8][9][10][11][12]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야마기와의 중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과 비교하며 피비게르의 수상이 부적절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14]

1966년, 노벨 위원회 위원을 지낸 스웨덴 의사 폴케 헨셴은 일본 도쿄 강연에서 "저는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야마기와 가쓰사부로에게 추서하는 것을 요구했습니다. 야마기와가 노벨상을 수상하지 않은 사실은 일본 국민 여러분에게 미안한 일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추서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15]

4. 노벨상 수상 논란

야마기와는 7차례(1925년, 1926년, 1928년 각 1회, 사후인 1936년 4회)에 걸쳐 노벨 생리학·의학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다.[7] 특히 1926년에는 덴마크의 의학자 요하네스 피비게르가 특정 선충(스파이롭테라 칼시노마, Spiroptera carcinoma)이 위종양을 유발한다고 주장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피비게르의 이러한 '발견'은 이후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신뢰성을 의심받게 되었다.[8][9][10][11][12]

야마기와 가쓰사부로는 1928년에 토끼의 귀 안쪽 표면에 콜타르를 칠하여 편평상피세포암을 성공적으로 유도했다.[13] 야마기와의 암 연구는 화학적 발암 연구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기에, 일부에서는 피비게르의 수상이 잘못되었으며 야마기와가 수상했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14]

1966년 노벨 위원회 위원을 지낸 스웨덴 의사 폴케 헨셴은 일본 도쿄 강연에서 "나는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야마기와 가쓰사부로에게 추서하는 것을 요구했다. 야마기와가 노벨상을 수상하지 않은 사실은 일본 국민에게 미안한 일이다."라고 말했지만, 실제 추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15]

5. 평가

야마기와는 7차례(1925년, 1926년, 1928년에는 각각 1차례, 사후인 1936년에는 4차례)에 걸쳐 노벨 생리학·의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했다.[7] 특히 1926년에는 덴마크의 의학자인 요하네스 피비게르가 유두종성 위종양을 유발하는 선충이라고 주장한 스파이롭테라 칼시노마(Spiroptera carcinomala)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는데, 피비게르의 이러한 '발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신뢰성을 의심받았다.[8][9][10][11][12]

야마기와 가쓰사부로는 1928년에 토끼의 귀 안쪽 표면에 콜타르를 칠하여 편평상피세포암을 성공적으로 유도했다.[13] 야마기와의 암 연구는 이러한 연구 방식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특히 야마기와가 노벨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피비게르의 노벨상 수상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14]

1966년에는 노벨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스웨덴의 의사인 폴케 헨셴이 일본 도쿄에서 가진 강연회에서 "저는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야마기와 가쓰사부로에게 추서하는 것을 요구했습니다. 야마기와가 노벨상을 수상하지 않은 사실은 일본 국민 여러분에게 미안한 일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15]

참조

[1] 저널 Gist of Dr. Katsusaburo Yamagiwa's papers entitled "Experimental study on the pathogenesis of epithelial tumors" (I to VI reports) 2014
[2] 백과사전 Katsusaburō Yamagiwa https://web.archive.[...] Shogakukan 2012-11-08
[3] 백과사전 山極 勝三郎 https://web.archive.[...] Shogakukan 2012-11-08
[4] 백과사전 山極 勝三郎 https://web.archive.[...] Shogakukan 2012-11-08
[5] 저널 癌腫ノ人工的發生ニ就テ 日本癌学会 1916
[6] 저널 癌 岩波書店 (岩波文庫) 1955
[7] 웹사이트 Katsusaburo Yamagiwa - Nomination Database https://www.nobelpri[...]
[8] 저널 Johannes Fibiger. Gongylonema and vitamin A in carcinogenesis 1978
[9] 저널 Johannes Fibiger and his Nobel Prize for the hypothesis that a worm causes stomach cancer 1992
[10] 저널 A challenged Nobel Prize: Johannes Fibiger, 1926 1997
[11] 저널 Of Fibiger and fables: a cautionary tale of cockroaches and ''Helicobacter pylori'' 2001
[12] 저널 An analysis of a wrong Nobel Prize-Johannes Fibiger, 1926: a study in the Nobel archives 2004
[13] 저널 Katsusaburo Yamagiwa (1863–1930) 1977
[14] 웹인용 Katsusaburo Yamagiwa's Nobel candidacy: Physiology or medicine in the 1920s http://chemeducator.[...]
[15] 뉴스 『ガンの山極博士』たたえる 196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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